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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디자이너의 판단력을 약하게 만드는 조건을 정답형 AI와 코치형 AI로 나누고 실제 AI 필름 제작 경험으로 비교합니다.
AI를 더 잘 쓸수록 디자이너는 더 잘 생각하게 될까요? 저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회사 창립기념 영상을 AI로 만들면서 TAKE 29가 넘어가던 순간, 저는 '연결'이라는 메시지를 고민하는 사람이 아니라 캐릭터 얼굴이 덜 이상한 컷을 고르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AI가 시안의 수를 늘려줬지만, 정작 제가 하는 판단의 깊이는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최근에 반려한 건
하이엔드 뷰티 브랜드의 연출 이미지였습니다. 결과를 보고 바로 반려했습니다.
이유를 한 줄로 적자면 하이엔드가 아니었습니다. 중국 느낌이 강했고, 저가형 생활용품 매장의 제품 연출컷처럼 나왔습니다.
이건 취향 문제가 아닙니다. 하이엔드 브랜드의 연출컷은 가격대를 보여주는 장치입니다. 이미지가 저가로 읽히면 제품 가격이 설득력을 잃습니다.
네 가지를 봤습니다
- 색 — 브랜드 팔레트 밖으로 나갔는가. 채도가 과하면 가격대가 바로 내려갑니다
- 환경 적용 — 제품이 놓인 공간이 그 브랜드가 있을 만한 곳인가
- 질감 — 소재가 소재로 읽히는가. 유리가 플라스틱처럼 보이면 끝입니다
- 인물의 매칭도 — 이 사람이 이 브랜드를 쓸 것 같은가
네 개가 각각 도는 게 아닙니다. 하나가 무너지면 나머지도 같이 무너집니다. 색이 저가로 가면 환경도 저가로 보이고, 그러면 인물까지 안 맞아 보입니다.
반대로 통과시킨 기준은 하나였습니다
반려 기준은 네 개인데, 통과 기준은 하나였습니다. 조명입니다.
조명이 제대로 들어오면 나머지는 대개 고칠 수 있습니다. 색은 보정하고 소품은 바꿀 수 있지만, 조명이 틀리면 이미지 전체를 다시 뽑아야 합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보는 게 아니라 가장 되돌리기 어려운 것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정답형 AI가 만드는 조용한 고착
AI를 쓰면 디자이너의 판단력이 좋아진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그게 AI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고 봅니다. 제가 직접 겪어봤을 때, 문제는 생각보다 조용하게 찾아왔습니다.
저희 팀이 처음으로 AI 필름을 제작했을 때 이야기입니다. 회사 마스코트인 강아지와 고양이가 흩어진 별을 발견하고, 별들이 하나씩 연결되어 임직원을 상징하는 별자리가 완성되는 1분 44초짜리 창립기념 영상이었습니다. 주어진 시간은 2~3일. 생성형 AI가 없었다면 시작도 못 했을 프로젝트였습니다.
문제는 작업이 시작되자마자 불거졌습니다. 강아지가 우주를 헤엄쳤고, 고양이는 한 마리에서 여러 마리로 늘어났습니다. 별자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거대한 행성이 들어섰고, 같은 캐릭터의 얼굴이 장면마다 달라졌습니다. TAKE 01에서 시작한 작업은 TAKE 12, TAKE 29를 넘어 수십 번째 결과까지 이어졌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단순히 오류가 많았다는 게 아닙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생성을 반복할수록 제가 집중하는 질문 자체가 바뀌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연결'이라는 공동체 메시지를 어떻게 영상으로 표현할까?"를 고민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이 장면에서 캐릭터 얼굴이 가장 안정적인 컷이 뭔가?"를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이 현상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는 개념이 디자인 고착(Design Fixation)입니다. 여기서 디자인 고착이란 초기에 접한 시각적 사례에 사고가 묶여, 그 범위를 벗어난 대안을 탐색하지 못하게 되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CHI 학회에 발표된 연구에서 생성형 이미지 도구를 사용한 참가자들이 초기 결과에 더 강하게 고착되었고, 아이디어의 수와 다양성이 도구를 쓰지 않은 집단보다 낮았다는 결과가 나온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출처: ACM Digital Library, Wadinambiarachchi et al., 2024).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라고 말하기 어려웠습니다. 오히려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AI가 처음 만들어낸 '우주 문법', 즉 행성과 빛 번짐과 극적인 배경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 프로젝트의 기준점이 되어버렸으니까요.
더 심각한 건 완성도 착시입니다. 손으로 그린 스케치는 미완성처럼 보여서 아이디어의 약점을 쉽게 발견하게 합니다. 그런데 AI가 만든 이미지는 처음부터 조명, 질감, 분위기가 완성되어 보입니다. 시각적으로 매력적인 장면이 전략적으로도 타당하다는 착각을 일으킵니다. 거대한 행성이 등장한 장면도 그랬습니다. 극적으로 아름다웠지만 '별 하나하나가 임직원이고, 연결될 때 공동체가 완성된다'는 서사와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제가 그걸 늦게 알아챘습니다.
정답형 AI가 초래하는 위험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최초 방향 고착: AI의 첫 결과가 프로젝트의 기준점이 되어 다른 서사 구조 탐색을 막는다
- 완성도 착시: 시각적으로 완성되어 보이는 이미지가 전략적 판단을 흐린다
- 선택 피로: 시안의 수는 많아지지만 탐색한 콘셉트의 수는 늘지 않는다
- 사후 정당화: 마음에 드는 결과를 고른 뒤 AI에게 전략적 이유를 만들게 한다
이 중 사후 정당화는 특히 위험합니다.
브랜드 전략이 결과물을 이끄는 기준이 아니라, 이미 선택한 결과를 설득하기 위한 문서로 뒤바뀌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런 순간이 있었고, 그때 제가 실제로 판단을 하고 있었는지 돌아보면 자신 있게 "예"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코치형 AI와 판단 회수율의 문제
코치형 AI가 더 낫다고 단정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그것도 상황을 좀 더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정이 2~3일밖에 없을 때 AI에게 반론과 질문을 천천히 요청하는 방식을 선택하기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습니다. 디자이너가 정답형 AI를 쓰는 이유가 단순히 생각하기 귀찮아서만은 아니라는 겁니다.
실제로 ActivTrak이 16만 명 이상의 직장인 데이터를 분석한 2026년 보고서에 따르면, AI 사용률이 80%까지 높아진 조직에서 AI 사용자의 일일 집중 시간은 9% 감소했고 평균 집중 세션은 13분 7초에 그쳤습니다(출처: ActivTrak Productivity Lab, 2026 State of the Workplace). AI가 절약한 시간이 깊이 생각할 여백이 아니라 더 많은 업무로 채워졌다는 신호입니다. 제가 직접 써봤는데, AI 필름 작업에서 이미지 한 장 만드는 속도가 빨라진 만큼 더 많은 장면을 생성하고 비교하게 됐습니다. 속도가 빨라진 게 아니라 의사결정의 밀도가 높아진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코치형 AI는 어떻게 쓰는 것일까요?
코치형 AI란 완성안을 대신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디자이너의 가설에 반론을 제기하고 누락된 평가 기준을 짚어주는 방식입니다. 쉽게 말해 "최선의 콘셉트를 만들어줘"가 아니라 "내 콘셉트가 진부해질 위험이 뭔지 짚어줘"라고 묻는 방식입니다.
프로젝트 후반에 저희 팀이 실제로 변화를 준 방식이 이것이었습니다. 서사 기준을 먼저 정했습니다. 마스코트가 별을 발견하고, 별들이 이동하고, 빛의 선이 연결되고, 별자리가 완성된다는 5단계 이야기를 사람이 먼저 고정했습니다. 캐릭터 기준도 정했습니다. 원본 2종만 사용하고, 장면마다 크기와 비율을 통일하며, 두 캐릭터의 특징을 섞지 않는다는 조건을 AI에게 주기 전에 팀이 먼저 합의했습니다.
그랬더니 달라졌습니다. AI가 "이 장면에 무엇을 넣을까"를 결정하는 범위가 줄고, "정해진 이야기를 어떤 카메라 시점으로 구현할까"를 탐색하는 역할로 좁혀졌습니다. 모든 컷을 '연결'이라는 메시지와 대조해서 판단하는 기준이 생겼습니다. 이게 코치형 AI 사용 방식의 핵심입니다.
여기서 제가 제안하고 싶은 개념이 하나 있습니다. 판단 회수율입니다. 판단 회수율이란 프로젝트의 핵심 결정 중 AI 없이도 그 근거를 자기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결정의 비율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핵심 결정 여섯 가지, 즉 해결할 문제, 바꾸려는 인식, 핵심 콘셉트, 평가 기준, 최종 방향의 선택 이유, 폐기한 대안의 이유 가운데 네 가지를 AI 창을 닫고도 설명할 수 있다면 약 67%입니다.
이 수치 자체가 절대적인 품질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건 프로젝트마다 이 질문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제 경험상 이 회고를 해보기 전까지, 저는 얼마나 많은 결정을 AI에게 넘겼는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생성 횟수는 기록에 남아 있었지만, 어떤 판단을 몇 번 수정했는지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이 문제는 사실 개인의 습관만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일정이 너무 짧고, 시안의 수가 생산성으로 평가되고, 탐색과 실패에 쓸 시간이 보장되지 않는 환경이라면 코치형 방식은 사치처럼 느껴집니다. 저희 팀이 프로젝트 이후 AI 필름 제작 기간을 최소 5일 이상으로 재설정하고, 대본과 콘티를 먼저 확정하는 프로세스를 만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AI 사용 방식을 바꾸는 것만큼 일정과 리뷰 구조를 바꾸는 게 중요했습니다.
제 반려 기준은 문서에 없습니다
솔직히 적자면 이 기준은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습니다. 머릿속에만 있습니다.
말로 풀면 두 줄입니다.
브랜드 아이덴티티와의 정합도가 맞아야 하고,
그 브랜드의 톤앤무드에 어우러지는 이미지 감도가 있어야 한다.
이 두 줄이 문제입니다
저는 이 문장으로 판단이 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이 두 줄을 주면 같은 판단이 나오지 않습니다. "감도"가 무엇인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판단력이 떨어지느냐는 질문에 저는 이렇게 답하게 됐습니다. 떨어지는 게 아니라, 꺼낼 수 없는 상태로 남는 게 문제입니다. 제 안에서는 잘 작동하는데 밖으로 못 꺼내면, 팀 단위에서는 그 판단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넘어가서 후회한 적은 없습니다
반려했어야 했는데 넘어간 적은 없습니다. 다행이라기보다 기준이 몸에 붙어 있어서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건 자랑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신호에 가깝습니다. 놓친 적이 없다는 건 제가 매번 직접 봤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물량이 늘어나면 언젠가는 못 봅니다. 그때를 대비해서 두 줄을 항목으로 쪼개두는 게 지금 해야 할 일입니다.
정답형 AI가 결론을 빠르게 앞당긴다면,
코치형 AI는 결론에 도달하기 전에 거쳐야 할 질문을 늘립니다.
정답형 AI는 현재 프로젝트의 결과를 남깁니다.
코치형 AI는 다음 프로젝트에서도 사용할 판단을 남깁니다.
그렇다면 어떤 작업은 정답형 AI에 맡기고, 어떤 작업은 코치형 AI로 다뤄야 할까요?
| 업무 단계 | 권장 방식 | 이유 |
| 파일명 · 포맷 정리 | 정답형 | 판단 위험이 낮고 규칙이 명확함 |
| 고정된 디자인의 배리에이션 | 정답형 | 전략이 이미 확정됨 |
| 장면별 기술 옵션 탐색 | 정답형 또는 혼합형 | 빠른 대안 생성이 유용함 |
| 누락 요소 점검 | 코치형 | 결론보다 질문과 검수가 중요함 |
| 문제 정의 | 디자이너 + 코치형 | AI의 첫 프레임에 고정될 위험이 큼 |
| 브랜드 콘셉트 설정 | 디자이너 + 코치형 | 전략적 가설과 우선순위가 필요함 |
| 상반된 대안 비교 | 코치형 | 장단점과 트레이드오프 탐색에 유용함 |
| 최종 방향 결정 | 디자이너 | 책임과 우선순위의 문제 |
| 법적·윤리적 판단 | 전문가 · 디자이너 | AI 답변만으로 확정할 수 없음 |
| 반복 실행 | 정답형 | 기준 확정 후 자동화 효과가 큼 |
핵심은 AI를 적게 쓰는 것이 아닙니다.
업무의 단계에 따라 AI의 역할을 바꾸는 것입니다.
초기에는 AI가 정답을 내리지 못하게 하고, 문제가 충분히 정의된 뒤에는 AI의 생성 능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AI 시대의 BX팀이 관리해야 할 것은 시안의 수만이 아닐 것입니다.
생성형 AI와 함께 작업한 뒤에도 핵심 결정을 사람의 언어로 다시 설명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이번 프로젝트의 판단이 다음 프로젝트에도 남았는지를 함께 점검해야 합니다.
좋은 AI 활용은 가장 빠르게 답을 얻는 방식이 아니라,
AI를 사용한 뒤에도 왜 그 답을 선택했는지 스스로 설명할 수 있는 방식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결론
창립기념 AI 필름은 무사히 완성됐고, 임직원 반응도 좋았습니다. 그렇지만 "AI로 2~3일 만에 영상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로만 정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수십 번의 생성을 반복하면서 저는 AI가 무엇을 잘 만드는지뿐 아니라, 제가 어떤 판단을 놓치고 있었는지를 더 선명하게 확인했습니다.
정답형 AI는 현재 프로젝트의 결과를 빠르게 만들어줍니다. 코치형 AI는 다음 프로젝트에서도 쓸 수 있는 판단을 남겨줍니다. 둘 중 하나만 고집하기보다, 업무 단계에 따라 AI의 역할을 의식적으로 전환하는 것이 앞으로 디자이너에게 필요한 감각이라고 봅니다. AI 없이 지금 내린 결정의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지, 이 질문을 프로젝트마다 한 번씩 꺼내보는 것에서 시작해 보시길 권합니다.
참고: ActivTrak Productivity Lab, 2026 State of the Workplace / Wadinambiarachchi et al., The Effects of Generative AI on Design Fixation and Divergent Thinking, CHI 2024 / Grace Liu 외, AI Assistance Reduces Persistence and Hurts Independent Performance / Anil R. Doshi·Oliver P. Hauser, Generative AI enhances individual creativity but reduces the collective diversity of novel content / 뱅울의 일상, 「AI 필름 제작하기」 / 오즈의 지식토킹, 「10분이면 무너지는 생각 근육」
역할 자체가 어떻게 옮겨가는지는 AI 시대 디자이너 역할 변화에, 성과 지표가 왜곡되는 지점은 AI 토큰맥싱과 검수 통과율에 정리했습니다. 어떤 모델을 어디에 배치할지는 AI 도구·사용법·비교가 기준이 됩니다.
AI 결과물을 반려하며 무엇을 봤는지 정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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